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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당신이 모르는 한글의 숨겨진 역사: 세종대왕이 공개하지 않은 이야기

by 숏숏히스토리 2025.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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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창제, 모든 것이 기록된 건 아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조선 세종 28년(1446년)에 반포된 문헌으로, 한글의 창제 원리와 운용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 문헌조차도 훈민정음 창제 과정의 전부를 담고 있지 않다. 우리가 아는 공식 기록은 모두 왕권에 의해 정제된 형태로 남은 것들이다. 세종대왕이 왜 굳이 ‘백성을 위해 만들었다’는 서문을 강조했는지도, 그 이면에 어떤 정치적 계산이 있었는지는 당시 내부 기록이 철저히 폐기되었기 때문에 공식 사서로는 파악이 불가능하다.

비공식 문헌 속 ‘비밀 조직’의 존재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당시, 집현전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세종실록》과는 별도로 남아 있는 비공식 필사본들에서는 ‘내부 비서 조직’이 존재했음을 암시하는 문장이 등장한다. 이들은 집현전 소속이 아니라, 왕명에 의해 따로 소집된 비공개 학자 그룹이었다고 전해진다. 정식 직제에 기록되지 않았고, 이름조차 남아 있지 않지만, 이들이 실질적인 음운 체계 분석과 실험적 문자 제작의 핵심을 맡았다는 설이 있다.

초기 한글, 실제로는 28자가 아니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총 28자의 문자가 제시되어 있다. 하지만 당시 남아 있는 목판 조각이나 유물의 일부 잔존 인쇄물에서는, 실험적으로 사용되었던 문자 조합이 최소 35자까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성조를 표시하는 부호, 중첩 음절을 구분하는 독립 기호 등의 흔적은 공식적으로 인정된 바 없지만, 여러 지역의 사찰 문서에서 발견된 바 있다. 이는 세종이 실제로는 ‘표기용 한글’과 ‘운용 실험용 한글’을 병행 제작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사대부의 반대와 한글의 검열 기록

세종 사후, 단종과 세조 시기를 거치며 한글은 지식인 사회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이는 단순한 ‘보수적 사대부의 반대’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실은 한글을 통한 비밀 문서 유통과 하위 신분층의 의사 표현 증가가 문제가 되었다. 《세조실록》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성삼문이 남긴 개인 유묵 속에는 ‘글자라는 것이 백성의 입을 살리고 또한 죽이게 하며, 마음의 벽을 허문다’는 구절이 있다. 이는 당대 상류층이 한글에 품었던 은밀한 두려움을 보여주는 대표적 예다.

여성 중심 한글 문화, 탄압의 대상이 되다

조선 중기 이후, 한글은 여성과 하층민의 문자가 되었다. 특히 궁중의 내명부, 기녀집단, 민간 여성 서간문을 통해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 문서들 중 일부는 중종반정 직후 집중적으로 소각되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이는 단순한 ‘궁중 정비’ 차원을 넘어, 여성 주도 하의 정보 확산을 통제하려는 의도적 조치였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중종 시기 ‘궁녀 폐문’ 관련 기록 속에는 ‘글을 읽고 서로 소통함이 점점 번성하니 폐단이 적지 않다’는 표현이 남아 있다.

한글과 불교 경전의 비밀 번역

세종은 유교 군주였지만, 말년에는 불교에 대한 태도가 한층 유연해졌다. 특히 훈민정음 반포 직전부터,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시도가 은밀히 이루어졌다는 증거가 일부 남아 있다. 《월인석보》가 대표적이지만, 그것보다 앞서 존재한 비공식 한글 불경 번역본은 대부분 의도적으로 은폐되거나 폐기되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16세기 불교 탄압기에도 살아남았고, 현대 들어 간송미술관 등지에서 일부 조각이 확인되었다. 이들은 문자 해독 구조와 어휘 배열 방식에서 해례본과는 차별화된 특징을 보이기도 했다.

세종의 후계자, 문자 계승을 거부하다

세종의 아들 문종과 손자 단종은 한글에 대해 지속적인 계승 의지를 드러냈다. 하지만 세조에 이르러 상황은 급변한다. 세조는 한글을 통한 민간 교류가 ‘국법을 흐리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집현전 폐지와 함께 문자 보급을 축소한다. 세종이 심혈을 기울인 문화정책 중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퇴출 수순을 밟은 것이 바로 훈민정음이다. 이는 단순한 정권 변화가 아니라, 문자 자체가 지니는 권력 이동의 상징성 때문이었다.

밀본 잔당과 한글의 은밀한 연결

조선 전기 밀본 세력은 태종 이후 조직적으로 해체되었지만, 그 잔재는 세종 시대에도 암암리에 남아 있었다. 흥미로운 건, 이들이 훈민정음을 새로운 암호 체계로 채택하려 했다는 정황이 후대 자료에 간헐적으로 등장한다. 조선 후기의 필사본 중에는 ‘밀본이 만든 29번째 자모’에 대한 언급이 나오며, 자모 배열 순서가 뒤섞인 비밀 문서의 실물이 존재한다. 이는 훈민정음이 단순한 백성 교육 도구가 아닌, 정치적 수단으로도 활용되었음을 암시한다.

한글 창제, 음성학적 체계의 정교함

훈민정음은 단순한 표음 문자가 아니라, 음성 기관의 구조와 발성 위치를 시각적으로 반영한 독창적 체계다. 자음은 발음 기관의 위치에 따라 입술소, 혀끝소, 목구멍소 등으로 분류되며, 모음은 하늘(•), 땅(ㅡ), 사람(ㅣ)의 삼재 사상을 기반으로 구성되었다. 이처럼 문자의 형태 자체가 발음 구조를 설명하는 기능을 가지며, 이는 세계 문자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특징이다. 세종은 이를 통해 문자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이들도 형태만으로 발음을 유추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이는 단순한 문자 발명 수준이 아니라, 음운론적 이해를 기반으로 한 과학적 창제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조선 왕조, 결국 한글을 두려워했다

세종이 만든 문자였지만, 조선 왕조는 한글을 진정으로 수용하지 못했다. 18세기 정조조차도 ‘여성의 글’로 분류하며 공문서에는 한자만을 고집했다. 한글은 민간에서는 살아남았지만, 정치 권력으로부터는 배척당한 문자였다. 세종의 의도는 문자를 통한 ‘정보 평등’이었을지 몰라도, 조선의 통치자는 문자 자체가 불러올 권력 이동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현대 한글 담론, 그 시작점조차 틀렸다

지금 우리가 배우는 한글 교육은 대부분 1940년대 이후 정립된 신국어학 체계를 따른다. 하지만 이는 세종이 의도한 훈민정음의 운용 방식과는 다르다. 당시 훈민정음은 표기 위주의 도구였으며, 문법 통일이나 규칙화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20세기 중반에야 교육 제도로 편입되면서, 한글은 다시 한 번 국가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이처럼 훈민정음은 창제 당시에도, 근대기에도, 끊임없이 권력과 지배의 중심에 있었던 문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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